저는 어릴 때부터 밥을 잘 먹었습니다. 특히 엄마가 끓여주신 콩나물국에서 콩나물만 건져낸 후에 밥과 고추장 그리고 참기름만 넣은 채 슥삭슥삭 비벼 먹으면 다른 반찬이 필요없었습니다. 밥을 여러 재료와 함께 비벼먹는 비빔밥은 냉장고에 남아있는 반찬을 비워먹기에도 제격입니다. 사실 밥과 고추장만 있다면 무엇을 넣어도 꽤 맛있는 비빔밥이 되기 때문에 시간에 쫓기거나 요리를 해먹기 귀찮을 때도 비빔밥은 훌륭한 대안이 되는 메뉴입니다. 오늘은 비빔밥이 나오는 드라마 두 편을 소개해볼까 합니다.
1. 사람들은 죽을 걸 알면서도 살잖아 - 내 이름은 김삼순 [MBC, My Lovely Sam-Soon, 2005]
요즘 영화나 드라마에는 주인공의 성격이나 모습 혹은 직업 등이 다양하게 나오지만 20년 전만 해도 뚱뚱한 노처녀를 주인공으로 하는 영화 혹은 드라마는 거의 없었습니다. 이 드라마가 방영되던 당시 주인공인 김삼순을 연기한 김선아 배우가 실제 몸무게를 증량하고 늘어진 티셔츠에 대충 만진 머리를 하고 의자에는 한 쪽 무릎을 세운 자세로 앉아 사이다 같은 대사를 소화하던 장면들은 매회 화제가 되면서 굉장한 인기를 끌었습니다. 여배우로서 쉽지 않은 선택이었겠지만 망가짐을 불사하고 극 중 캐릭터에 몰입한 김선아 배우는 자칫하면 드세기만 한 노처녀로 보일 수도 있는 김삼순이라는 인물에 솔직함과 사랑스러운 매력을 불어넣어 20년 가까이 지난 지금도 회자되는 캐릭터로 살려냈습니다. 뚱뚱한 노처녀인데다 이름도 촌스러워서 마음에 안 드는 자신의 현실에 실연과 실직까지 겹친 삼순은 다이어트를 시작합니다. 그렇지만 야심차게 시작한 다이어트 식단을 억지로 먹고 있는 삼순의 앞에서 마치 보란듯이 그녀의 엄마와 언니는 보기에도 군침도는 비빔밥을 만들어 먹습니다. 하필 다이어트를 하고 있는데 고소한 참기름 냄새를 풍기는 푸짐한 비빔밥이라니 얼마나 먹고 싶었을까요. 결국 식구들이 모두 잠든 밤, 삼순은 혼자 식탁에 앉아서 반찬통을 다 꺼내어 낮에 엄마와 언니가 먹었던 비빔밥을 만들어 먹으며 소주까지 곁들입니다. "인생 뭐 별거 있어. 오늘까지 먹고 내일 다시 하면 돼" 라며 스스로를 위로하는 모습은 현실과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한밤중에 홀로 식탁에서 비빔밥을 만들어 먹는 이 장면은 그야말로 침샘과 식욕을 자극하기에 충분한 모습이었습니다. 일반적인 로맨틱 코미디 드라마 여주인공들 같은 예쁘장한 모습이 아닌 주변에서 흔히 보는 사람들과 다를 바 없이 반찬을 그릇째 가져다가 양푼비빔밥을 만들어 먹는 모습은 너무나 현실적이어서 사람들의 기억에 더욱 오래 남는 장면이 된 것 같습니다.
2. 나는 당신을 잊지 않았습니다. - 너의 목소리가 들려 [SBS, I can hear your voice, 2013]
이 드라마 역시 10년전에 방영된 드라마이지만 여름이 되면 늘 생각나는 작품입니다. 드라마의 배경도 여름이지만 비가 시원스레 쏟아지는 장면이 많이 나와서 그런 것 같습니다. 시청률도 매우 높았던 만큼 배우들의 연기도 좋았고, 이 드라마의 주연을 맡았던 이보영 배우는 그 해 연기대상을 받기도 했습니다. 어린 시절에 사고로 조작된 살인으로 아버지를 잃은 박수하(이종석 분)는 아버지의 사고 후부터 상대방의 눈을 보면 상대방의 속마음이 들리게 됩니다. 그리고 박수하 아버지가 살해당한 사건의 목격자인 장혜성(이보영 분)은 위험을 무릅쓰고 법정에 증인으로 나섰다가 살인마(정웅인 분)의 표적이 됩니다. 살인마가 마음 속으로 복수를 다짐하는 것을 듣게 된 수하는 장혜성을 지켜주겠다는 다짐을 하며 살아갑니다. 시간이 흘러 당시 고등학생이던 장혜성은 어엿한 국선변호사가 되었고 어렸던 수하를 기억하지 못한 채 수하와 만나게 됩니다. 장혜성 변호사(이하 주인공)의 집에서 처음 밥을 먹게 된 수하에게 주인공은 반찬과 옥수수콘 통조림 등을 몽땅 섞어 플라스틱 통에 넣고 흔든 나름의 비빔밥을 건넵니다. 이를 본 수하는 "이거 혹시 개밥이야??" 라며 어이없어 하고 주인공은 더 달라는 말이나 말라며 자신있게 밥을 내밉니다. 이 후 교통사고로 인해 기억을 잃었다가 되찾은 수하는 주인공 곁에서 머물고 싶어서 기억을 찾은 사실을 숨긴 채 지냅니다. 그러다 주인공이 만들어준 참치캔 비빔밥을 보고 수하는 자신도 모르게 "또 개밥이야?" 라는 말을 하고 이를 들은 주인공이 수하가 기억을 되찾은 게 아닐까 의심하게 되는 계기가 됩니다. 이 드라마에서 비빔밥은 보통 생각하는 비빔밥과 달리 즉석밥 위에 장조림이든 옥수수콘이든 아무거나 붓고 고추장 혹은 참기름에 비빈, 그야말로 초간단하게 만들 수 있어 주인공이 즐겨 먹는 특유의 메뉴입니다. 청소나 요리할 시간 없이 바쁘게 살아온 주인공의 단골 메뉴이자 중요한 것 외에는 별 관심도 없이 대충 처리하는 주인공의 털털한 성격이 엿보이는 음식이기도 합니다. 또한 주인공의 비빔밥을 먹어본 사람은 오직 수하뿐이었기에 비빔밥은 서로에게 공유된 기억 혹은 두 사람만이 알 수 있는 코드로 작용하는 듯 합니다. 이 드라마는 법정물이면서도 스릴러, 로맨틱 코미디 등의 요소가 마치 비빔밥처럼 골고루 섞여 보는 내내 지루할 틈이 없습니다. 매 회 법정에서 다뤄지는 이야기들과 함께 주인공들의 주요 서사가 진행되면서 각 캐릭터들이 어떻게 조금 더 성장해 가는지 보는 재미와 감동이 있기에 아직 못 보셨다면 한번쯤 꼭 보시길 권합니다.
3. 마치며
비빔밥은 비행기 기내식으로도 인기가 많다고 합니다. 또한 외국인들에게는 다양한 채소를 골고루 섭취할 수 있는 메뉴로 인식되어 특히 채식가들이 많이 찾는다고 합니다. 어떻게 보면 모든 재료를 넣어 섞은 것 뿐이지만 그 안에 들어간 재료들이 각자의 맛을 뽐내기도 하고, 기가 막힌 조화를 이루기도 하는 것은 비빔밥이 가진 매력인 듯 합니다. 요리할 시간은 없고 반찬마저 부실할 때 남아있는 반찬들을 밥과 함께 비벼 먹으면 제법 어엿한 한 끼로 변신하기도 합니다. 편하게 먹을 수 있으면서 맛도 좋은 비빔밥에 계란 후라이를 얹고 삼순이처럼 소주 한 잔 곁들여 밀린 영화를 보는 것도 나름 근사한 계획일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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