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원래 애국심하고는 거리가 남들만큼 있다, 라고 생각하고 살았습니다.
시대를 잘 만난 덕에 힘든 독립운동을 안해도 되고, 북한으로 인해 가끔 긴장이 되는 날들도 있지만
이마저도 무뎌진건지 익숙해진건지, 아무튼 평소에 애국심이나 나라에 대해 그닥 생각할 일이 많지 않습니다.
그래도 외국에 나가 있거나 이제는 더 이상 제 또래가 아닌 군인들을 볼 때면 애국심과 연결될 뭐 그런 정도의 감정이 가끔 생기는 듯 합니다.
오늘은 삼일절입니다. 평소처럼 저는 그냥 휴일 중 하루라고 생각하고 지낼 날이었습니다.
그런데 아침부터 온 문자에 오늘의 휴일은 더 이상 단순한 휴일이 아니게 되었습니다.
동네 백화점에서 개장전부터 부지런히 광고 문자를 보냈는데, 그 문자를 본 순간 갑자기 짜증스러워지기 시작했거든요.
MMS 로도 모자라 링크를 곳곳에 삽입한 문자의 내용 중 '져지 데이'를 기념하여 만원 상당의 기념품을 증정한다는 내용이 확 들어왔습니다. 관련된 전시 내용은 위대한 농구선수 75인전이었습니다.
전시이다 보니 며칠에 걸쳐 하던 행사겠지만 하필 오늘은 삼일절이었고, 백화점의 그 긴 홍보 문자중 어디에서도 삼일절을 언급한 내용은 없었습니다. 심지어 이름도 처음 들어본 '져지 데이' ? 그게 뭐지? 농구랑 관계된 날인가??
설마 그 져지가 의류 중 흔히 일컫는 그 져지일 줄은 몰랐습니다.
위대한 농구 선수 75인 포스터가 크게 떠 있는 백화점을 홍보물을 보니 참 할 말을 잃었습니다. 많고 많은 날 중 왜 오늘 딱 하루가 져지 데이인지 별로 알고 싶진 않습니다.
그토록 광고를 원하는 백화점을 위해 저도 여기 실어드리지요.
그 뒤를 이어 나온 광고들 중에는 삼겹살 데이를 핑계로 또 뭔가를 세일하는 내용이 있었고 심지어 삼겹살은 오타났더군요. (뭐 오타 안나는 사람 어디있겠습니까만..) 이쯤되면 미운 아이는 뭘 해도 미운건가 싶은데 독립운동 하신 분들과 세종대왕 모두를 슬퍼지게 만드는 일타쌍피, 두 개를 동시에 해낸 백화점의 문자에 아침부터 짜증이 났습니다.
해당 전시를 폄하하려는 것은 아니고, 적어도 오늘만큼은 비록 흉내내기에 그칠 지 몰라도 삼일절 기념 이벤트 등이 더 어울렸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네, 하루만 반짝하고 또 잊어버리고 살지라도요. 그러려고 국경일 만들어 기념하는거 아닌가요? 평소에 다 잊어버리고 살더라도 그 날 하루는 기억하자고.
나라없는 설움 안 겪고, 피 흘리는 독립운동 안해도 되게 만들어주신 그 분들은 정작 오늘날 그 분들 덕에 우리가 당연하게 누리는 그 모든 것들을 누리지 못하셨습니다. 독립이 되었는지 알지도 못한 채 숨을 거두신 분들도 많으셨겠지요. 그럼에도 누군가는 후대의 우리를 위해 그렇게 목숨바쳐 나라를 독립시키기 위해 살다 가셨는데 남아서 그 덕을 보고 있는 우리는 과연 그분들에게 감사한 마음을 갖고 있긴 한지, 저 스스로도 참 반성이 되더군요.
저는 바로 방 구석에 있던 태극기를 꺼내 게양했습니다. 사실 오래된 저희집 베란다엔 태극기를 꽂을 수 있는 곳도 없더군요. 그 핑계로 늘 국경일엔 태극기를 생략했는데 오늘은 기를 쓰고 끈으로 묶어 태극기를 게양했습니다.
이런 제 모습에 나도 꼰대구나 싶어 헛웃음이 나기도 했지만, 이런 것에 분노하는 것이 꼰대라면 저는 꼰대 하겠습니다.
10대, 20대에도 국경일이 뭔지, 삼일절이 뭔지 몰랐던 것은 아닙니다. 다만 그것을 기념하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는 사실 한번도 생각하지 않은 채 살아왔었습니다. 그렇지만 세월이 지나 짧지 않은 시간의 인생을 살아오면서 가치의 비중을 조금씩 다르게 두게 되는 것 같습니다.
나라가 있다는 것, 내가 어디서든 내 나라 라고 부를 수 있는 곳이 있다는 것, 이 땅에서 식민지의 사람으로 노예처럼 사는 것이 아닌 당당한 한 국가의 국민으로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가능하게 해주신 분들에 대한 감사함을 적어도 오늘 삼일절에는 한번쯤 가졌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영화 암살,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저는 아직 다 보진 못했지만)을 보신 분들이라면 아마 제가 오늘 느꼈던 감정 이상의 것을 느끼셨을거라 생각합니다. 반면에 지나간 역사에 대한 관심이 낮아서 별 생각을 안하고 지내는 경우도 많을 것 같습니다. 저도 역사에 대한 관심이 큰 편은 아니었지만 영화나 TV 의 내용을 접하고서야 새삼 느끼거나 알게 된 것들도 많았으니까요.
저의 짧은 글보다 수만배는 더욱 효과적이고 파급력이 큰 드라마와 영화에서 이러한 내용을 좀 더 많이 다뤄준다면 잊고 지냈던 감사함을 좀 더 자주 떠올릴 수 있는 이들이 더욱 많이 생길 수 있지 않을까 하고 바라봅니다.